한류에 대한 중국의 제한에서 벗어난 첫 번째 가수가 검정치마라는 점은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남긴다. 검정치마는 아이돌 그룹으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한류 가수가 아닌, 서울 홍대 앞에서 성장한 인디밴드다. 음원 유통은 메이저 음반사에 맡기기도 하지만, 음반 제작 방식이나 과정은 여전히 인디음악의 형태를 고수하고 있는 팀이다. 검정치마의 중국 공연은 수만 명 단위로 관객을 모으던 아이돌 그룹 공연과 달리 1,600명 규모였다. 중국 사회 일반이 느끼는 영향력도 그리 크지 않다. 사회적 파급력이 미미한 인디밴드였기에 중국 공연 허가가 내려졌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검정치마의 리더 조휴일의 국적이 미국인이라는 사실도 공연 허가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바로 몇 달 전, 부산 출신 인디밴드 세이수미 베이징 공연이 추진되다가 멈춘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점은 한국을 본거지로 하는 인디밴드가 8년만에 중국에서 공연을 열었고, 현장에는 관객이 가득했으며, 여기에 힘입어 다른 도시로까지 추가 공연을 개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인디밴드 중국 공연 성공 소식이 더 흥미로운 까닭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중국 팬의 호응이 단지 아이돌 음악과 주류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에 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로 확장되어 있음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외교부가 2024년 발간한 <2023 지구촌 한류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한한령에도 불구하고 약 1억 82만 명의 한류 팬덤·동호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한류 소비국이다. 몇 년간 멈췄던 한국 드라마 수입이 2022년 잠시 공식적으로 열렸던 시기, 한국 드라마는 중국에서 즉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을 정도다. 물론 이듬해 중국 정부는 다시 한국 드라마 수입 제재를 재개했다. 하지만 현재도 중국에서 공식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중국 언론에 한국 아이돌이나 한류 관련 단신이 소개되면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오를 정도로 그 인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글로벌 형식과 스타일의 개성이 더해진
한류를 이해할 때 간과해서는 안 될 지점이 하나 있다. 바로 음악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형식(form)이라는 측면에서 글로벌 대중문화의 표준적 형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90년대 중반 서태지에서 HOT에 이르는 한국 아이돌 음악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드럼머신과 샘플링, 신시사이저 등 디지털 악기의 적극적 활용에 있었다. 한국에 막 도입된 디지털 악기의 적극적 활용을 통해 음악가들은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음악과 동일한 소스와 기법을 활용해 자신의 음악에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디지털 기술의 사용과 함께 성장한 케이팝은 현재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음악가의 작업 결과물을 모아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신곡을 만드는 형태로까지 발전했다.
음악만 글로벌 형식을 내면화하게 된 건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설명할 때도 할리우드가 만든 특정한 형식과 미장센 구성 같은 측면이 반드시 언급된다. 그만큼 한류로 일컬어지는 한국 대중문화는 한국 밖 세계와 상호교차 하는 흐름 위에서 형성되었으며, 외부에서 유입된 형식이 한국적 문화 요소와 만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혼종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류는 스토리텔링 방식, 영상 언어, 음악 악곡 구조, 샘플링 사용 방식, 음색에 이르기까지 온라인으로 연결된 세계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형식을 기본으로 삼고, 그 위에 한국 문화의 특수한 성격을 일정 수준 가미하면서 스타일을 창조한 대중문화다. 이를테면 재즈라는 음악 형식은 미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유럽에는 각국의 음악 스타일을 더한 각자의 재즈가, 일본에는 일본 고유의 스타일을 더한 일본 재즈가, 한국에는 한국 스타일 재즈가 존재하는 식이다.
재즈라는 하나의 형식에 기반하고 있기에 재즈 팬은 각국에서 만들어진 재즈에서 공통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각 문화의 독특한 성격이 반영된 스타일을 빠르게 이해하게 되고, 그 안에 담긴 미학적 독창성과 개성을 즉각적으로 즐길 수 있게 된다. 형식을 공유하는 음악이 형식에 대한 이해를 가진 팬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는 이유다. 케이팝 역시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 보편화된 대중음악 형식을 공유하면서, 그 위에 한국적인 정서나 음악, 악기 등을 집어넣어 독특한 스타일을 창출하며 세계와 소통 중이다
다코우에서 시작된 중국 대중음악의 변화
중국 대중문화를 이야기할 때 1990년 대에 겪은 변화는 대단히 중요하다. 1980년대 중국 영화가 첸카이거, 장이모우로 대표되는 5세대 감독이 중국 근대 변혁기를 다룬 영화로 새로운 서사 구조를 만들었다면, 1990년대 활동을 시작한 지아장커, 장위엔 등은 천안문 사태 이후 현대 중국인의 감성과 도시문제 등을 전면에 내세웠다. 중국 당국의 검열로 중국 내에서 정식 상영을 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을 만큼 6세대 영화는 새로운 세대의 정서를 날카로운 스타일로 발전시켰다.
같은 시기 중국 대중음악도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6세대 감독들이 현대 도시의 삶과 패배주의적 한계를 이야기했다면, 1990년대 중국 대중음악은 중국 밖 음악의 흐름에 깊이 경도된 세대가 주도했다. 이들은 6세대 감독만큼이나 중국의 폐쇄성에 한계를 느꼈고, 그러면 그럴수록 중국 밖 음악에 대한 갈구를 키워 갔다.
1990년대 중국 대중음악 변화의 핵심에는 '다코우(打口)' 음반이 있었다. 미국에서 폐기 목적으로 구멍을 뚫어 중국에 수출한 CD였지만, 중국 청년들은 이를 통해 서구 록과 팝 음악을 접하며 중국 밖 세계를 상상했다. 1990년대 중반 중국 유학생들이 한국으로 가져온 펀칭 뚫린 씨디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록과 펑크 장르였을 정도로, 다코우는 폐쇄된 중국에서 서구 대중음악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동시대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소위 'D-세대'는 기존과 전혀 다른 질감의 새로운 중국 록 음악을 만들어냈다. 다커우 노점이 모여있던 베이징의 대학촌 우다오커우(五道口) 지역이 중국 펑크록의 발상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처럼 다양한 해외 음악을 받아들이며 독특한 취향 공동체를 형성해 온 중국에서, 한국 인디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