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기점으로 드라마 분량 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16부작 중심의 TV 드라마와 달리 회차를 절반 수준으로 줄인 6~8부작 드라마들이 OTT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대신 영화처럼 강렬한 소재와 촘촘한 스토리 전개를 부각하여 몰입도를 높였다.
비슷한 시기, 방송가에서도 변화의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CJ ENM의 영화 전문 채널 OCN이 ‘영화 같은 드라마’를 표방하며 2019년부터 ‘드라마틱 시네마’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다. 영화감독, 영화 부문 스태프들이 함께 드라마를 만드는 시도였다. 이 경우엔 기존 TV 드라마와 분량은 동일하게 제작하면서도, 스릴러 등 영화에서 주로 활용되던 소재를 가져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해당 프로젝트로 제작된 드라마로는 <트랩>(2019), <타인은 지옥이다>(2019), <번외수사>(2020) 등이 있다. 이 같은 OCN의 시도는 방송계에서 큰 화제가 됐으며, OCN의 작품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양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토종 OTT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웨이브는 2020년 ‘시네마틱 드라마’를 표방하며 <SF8>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한국영화감독조합과 MBC가 함께 기획했으며, 영화제작사 수필름에서 만들었다. 총 8부작으로 이뤄졌으며, 김의석·노덕·민규동·안국진·오기환·이윤정·장철수·한가람 8명의 영화감독이 한 회차씩 맡아 연출했다. 각각 인공지능(AI), 증강현실(AR), 재난 등을 소재로 삼았으며 영화에서 자주 활용됐던 SF 장르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접목해 호평을 받았다.
이후엔 ‘드라마틱 시네마’, ‘시네마틱 드라마’와 같이 영화와 드라마의 결합을 전면에 내세우고 강조하는 움직임은 사라졌다. 이 점을 부각하는 것이 큰 화제가 되지 않을 만큼,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투입되는 인력의 다수가 영화 출신 감독, 작가, 스태프 등으로 구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영화적 특성을 더한 장르물을 내세워 드라마를 잇달아 만들고 있다.
그중엔 오랜 경력을 가진 베테랑 감독들이 다수 있다. <수상한 그녀>(2014), <남한산성>(2017) 등을 만든 황동혁 감독은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 시즌 1, 2를 연출해 K-콘텐츠 열풍을 주도했다. <자산어보>(2021), <왕의 남자>(2005) 등의 이준익 감독은 티빙의 <욘더>(2022)를, <범죄도시>(2017)의 강윤성 감독은 디즈니+의 <카지노>(2022)를 만들었다. <부산행>(2016) 등의 연상호 감독은 티빙의 <괴이>(2022), 넷플릭스의 <지옥>(2021) 시즌 1과 시즌 2를 연출했다. <군도>(2014), <돈>(2019) 등을 만든 윤종빈 감독은 넷플릭스의 <수리남>(2022)을 선보였다.
신인 감독들도 드라마 연출에 적극 나서고 있다. 티빙의 <몸값>(2022)은 신인 정우성 감독의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칸 국제시리즈 페스티벌에서 한국 드라마 최초로 각본상을 받기도 했다. <기생충>(2019)으로 오스카에서 봉준호 감독과 각본상을 공동수상한 한진원 작가는 티빙의 드라마 <러닝메이트>로 올해 연출 데뷔를 앞두고 있다.
영화와 드라마의 크로스오버는 단순히 인력의 물리적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적 특성이 드라마에 고스란히 녹아들며 새로운 확장성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드라마를 만들 땐 연출과 극본 집필이 분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영화감독들이 드라마를 만들며 이전과 다른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황동혁, 연상호 감독 등은 드라마 작업을 할 때도 연출과 극본을 함께 맡았다. 감독이 직접 극본을 집필하는 경우가 많은 영화계 특성이 드라마에도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감독의 세계관과 철학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영화적 작업 방식이 드라마 시장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영화 인력뿐만 아니라 카메라와 조명 등 영화 촬영 장비가 드라마 촬영에 적극 활용되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한다. 이에 따라 장비를 활용해 구현하는 촬영 기술과 효과도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결국 작품의 분량이 다르다는 점 이외엔 특별한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 장르의 특성이 유사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류 중심축의 견고한 발전을 위하여
영화와 드라마의 결합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다. 우선 OTT에서 영화계에 러브콜을 잇달아 보내고 있다. K-콘텐츠 열풍을 이어갈 뛰어난 작품성을 갖춘 드라마를 다수 만드는 것이 OTT의 목표인 만큼, 이를 구현할 영화계 인력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방송사 역시 영화감독들과 손잡고 있다. 잘 만든 드라마를 통해 채널의 가치를 높이고, 국내외 OTT에 방영권까지 판매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이 심화하며, 한편에선 드라마 시장에 영화 인력을 대거 빼앗기고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산업의 축소를 겪으며 영화 창작자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출구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팬데믹이 끝난 현재까지도 극장을 찾는 국내 관객은 많지 않다. 이에 따라 영화 제작을 하기 위한 투자는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어렵게 제작을 하고 개봉까지 한다 해도, 손익분기점을 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24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한국 상업영화는 30.9%의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4년엔 16.4%의 적자를 낸 것으로 추산된다. 편수로 따졌을 때도 2024년 기준 전체 37편 가운데서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10편에 불과하다. 즉 영화 시장에서 수익을 올리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창작 활동은 물론 생계를 이어가는 것마저 어려워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드라마 제작은 활력소가 되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를 통해 창작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공적인 드라마 연출을 기반으로 차기 영화 제작을 위한 투자까지 끌어낼 수 있다. 또한 드라마를 재밌게 본 관객의 관심이 영화로도 연결될 수 있다.
초장르적 실천은 창작자의 세계관 확장을 위한 새로운 무기 그 자체로도 각광받고 있다. 상업 영화는 세대를 불문하고 최대한 많은 관객이 좋아할 만한 소재를 내세웠을 때 흥행에 성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면 감독이 자신만의 개성을 극대화하여 세계관을 구축하고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갖긴 쉽지 않다. 하지만 영화와 드라마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게 되며, 감독은 세계관을 마음껏 확장할 수 있게 됐다.